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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갈비의 이중성_J

날하봄의 연애

by 여돌북클럽 2020. 2. 23.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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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점심 메뉴는 닭갈비였다. 그냥 닭갈비도 아닌 '고수 닭갈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이 빠를 정도로 유명한 닭갈비 전문 프랜차이즈 매장이다.(개인적으로 난 그닥 별로) 

 

 베르의 요청으로, 활동팀 세 명이 함께 했다.(만난 이유는 교제보단 홍보 회의) 다소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것에 최대한 신경쓰지 않고 오고가는 대화와 들어오는 질문에 적당히 응대하며 음식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그 때 닭갈비살을 오물거리던 베르가 무심한 듯 질문을 던졌다.

"제이 오후 반차지? 따로 약속이 있는거야?"

 

  그렇다. 반차를 썼다. 교회 중고청 연합 수련회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제 취소가 됐다. 전 세계적으로 강력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청정 지역이라고 믿었던 전주마저 코로나19 양성 판정자가 나왔다. 언론, 정부 및 지자체 부터 지인에 이르기까지 개인 신상을 담은 정보가 내 핸드폰으로 우수수 전송됐다. 개인 신상 뿐 아니라 이동 동선까지 아주 자세했고 다양했다. 여하간 코로나19의 강력한 파급력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네, 오늘 교회 수련회가 있었는데 어제 취소됐어요."

그렇게 수련회는 취소되어 반차의 명분이 사라졌지만, 나는 반차를 취소하지 않았다. 아마도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갖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오후에 예정된, 하지만 나의 반차로 연기된 사업계획서 회의를 하기 싫은 것도 있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베르가 즉각 반응했다. 

"지금 이 난리인데, 그야 당연히(수련회) 하면 안 되지"

 

 코로나19로 인한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더 실감나게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대화는 코로나19와 관련된 우스갯 소리를 나눈 뒤 다시 교회 수련회 이야기로 돌아왔다. 베르는 수련회 및 교회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20살까지는 교회를 다녔는데, 구속과 강압 분위기가 싫어서 안다니게 됐고, 와이프 따라 현재는 천주교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종교자체로 볼 땐 기독교, 천주교보다 불교에 좀 더 관심이 간다라는 말도 덧붙였다.(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어서 베르는 예전에 재밌는 일화가 있었다며 서둘러 입을 뗐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했던 스님이 있거든. 어느 날이었는데 그 스님과 함께 목사님까지 대화하는 자리가 있었어. 그렇게 나 포함 셋이 대화하는데 성경에서 나온 오병이어 얘기가 나왔어. 모두 교회 다니니까 오병이어 사건은 다들 알지? 보통 오병이어에 대해서 목사님들이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만 말하잖아. 그런데 그 오병이어에 대해서 스님의 해석이 참 재밌고 기억에 남아. 그게 뭐냐면, 오병이어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면서. 오병이어 때가 사람들이 피난을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중요한 건 사람들이 아마도 주머니에 음식을 조금씩이라도 다 가지고 왔을 거라는 거지. 예수님은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 각자 가져온 음식들을 모두 자발적으로 꺼내놓도록 공동체적 리더십을 발휘한거고. 그런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모습, 크 멋있잖아.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만 먹으려고 챙겼던 음식을 함께 나눠먹기 위해 예수님 앞으로 가져와 십시일반 모았다는 게 말야. 그런 예수라면 참 믿을만 한거 같아. 지금처럼 카톡도 없는 시절에 그런 일을 만들었잖아. 그런데 교회에선 진짜 오병이어 그 자체의 신비한 능력만 강조하고 심지어 강요해. 요즘 청년들은 웃어. 그게 말이 되냐고 하면서. 솔직히 그게 사실일 수가 없잖아. 심지어 자기 부모님 말도 안 듣는데, 그런 비현실적인 성경이야기를 요즘 청년들이 듣겠냐구. 스님처럼 요즘 시대에 맞게 해석해내야 요즘 청년들이 반응하지. 안그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션만 취했을 뿐 그 어떤 평가도 말로 내뱉지 않았다.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병이어는(내가 알고 있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하며, 이미 임했지만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준 사건이다. 그런데 베르가 이를 어찌 알 수 있으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한 가지 사실에 가까운 마음의 단면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말이 너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해석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인격적 성품이 엿보여 따뜻하기까지 했다는 것.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더라면 오병이어에 대한 나의 주장은 허무맹랑하다고 여겼을 것이고, 베르의 주장에는 무언의 동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베르가 말했다. 

 "나는 기독교를 싫어했는데, 요즘은 아니야.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기독교에 대한 내 편견과 고정관념이 깨졌다고나 할까. 왜 그렇게 된 줄 알아? 제이하고 율무 때문이야."

 

  잉? 이게 무슨 말인가. 지금 이 말은 거의 신앙 고백에 가까웠다. 이어서 베르가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고집 세고, 자기 입장이나 주장만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을 보면서 내 편견이 깨졌어. 이렇게 착하고, 배려심 있고, 그리고 열정적이기까지 한 기독교인들이 있다는게 놀라웠어. 그래서 요즘엔 기독교인들이 달리 보여."

 

 여기서 더 나아가 기독교가 나아가야할 방향까지 제시했다.

 "난 사실 목사님 같은 종교인을 존경해. 왜냐면 그들은 나처럼(사업가, 회사원 등) 먹고 사는 문제에 혈안인 사람들에게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정신적인 가치관이나 삶의 교훈 등을 제공해 주니까. 난 그렇게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 수 없거든. 그런 점에서 종교인분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있어 정신적 지주, 영적 혹은 지적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역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번에는 한 점 의심이 없는 그런 끄덕임이었다. 정녕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해만 없을 뿐,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 세상의 이치와 삶의 이치, 높은 도덕 및 윤리적 가치, 인격의 다양성 인정 및 상호 간 존중의 태도 등 고차원적인 개념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었다. 나와 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더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동시에 이런 상념에 빠졌다.

 '복음이 인간의 이성과 타당함 안에서 현실적으로 제한되어 해석되니까 이들이 반응하는 구나.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비)진리에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편견이라는 게 깨질 수도 있구나. 그렇다면 복음이 이렇게 작게 또는 제멋대로 해석되어도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건가? 아니면 이 반응과 고백은 잘못된 것으로 봐야하나? 더 나아가 과연 그들은 복음이 갖고 있는 초월적인 위대함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 그전에 나는 복음을 과연 제대로 잘 이해하고 있기는 한 걸까? ... ' 

 

 2

한참 뒤 카페에서 홀로 글을 쓰는데, 이랑이에게서 다음과 같은 카톡 내용이 왔다.

  <이렇게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이 이 사태에 대하여 교회가 참여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대책을 세울 수 있겠지만 세상과 함께 가는 교회, 그러면서 가정에서 중계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서 우리 예배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라도 교회의 고민과 자에를 얘기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위 글의 요지는 코로나19로 인해 부득이하게 금주 주일 예배는 쉰다는 글이었다. 밑줄 친 부분에서 내 시선과 생각이 멈췄다. 놀랍게도 <이렇게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의 무서움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세상이 교회에게 이렇게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 이유였다. 세상과 코로나19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예배'를 막을 수 있을만큼 강력했다. 물론 감염병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한 상황에서 세상이 교회에 요구한 예배(모이는 행위) 자제 및 중단의 권고는 충분히 합당했다고 본다. 그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러한 인권적 이해 속에서 내린 조치이기에 온당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는 처사 혹은 의도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미다.

 

 세상은 시대적 흐름이 존재하고, 그 흐름에 따른 시대적 요구를 따른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요구가 아닌 삼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 그것도 전적으로. 그렇다고 교회는 세상의 시대적 요구에 따르지 않아야 한다 혹은 따라야 한다 식의 이분법적 논리를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다만 그 세상이 말하는 시대적 요구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받아드리고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다. 난 이것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의 요구에 속절없이 굴복해서는 안 된다. 물론 세상의 요구라고 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거부 혹은 대항해서도 안 된다. 곧 세상의 요구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목적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이루는 은혜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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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닭을 좋아한다. 그래서 닭갈비도 물론 좋아한다. 한국식 매운 양념에 각종 야채를 듬뿍 넣어 볶아 먹으면 기가 막힌다. 떡과 면, 거기다 치즈, 고구마 등 다양한 토핑과 함께 넣어먹으면 더더욱 맛있다. 닭갈비는 값도 비교적 저렴하고 무엇보다 양이 풍부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국민 음식으로 봐두 무방하다. 그만큼 보편적으로 많이 사랑받는 음식이다. 그런데 또 하나, 닭갈비하면 생각나는 말이 '계륵'이다. 고사성어로 삼국지의 조조 일화에서 탄생된 말이라고 한다. 국어사전에 계륵을 검색했다. <크게 득이 되지도 않지만 버리기도 아까운 것> 즉 <저 먹자니 싫고, 남 주자니 아깝다>는 우리 속담과 유사하다.

 

 순간 씁쓸했다. 복음과 닭갈비가 되게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복음은 기독교인이라면 귀에 닳도록 자주 듣고 쓰는 말이다. 혹 세상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뜻하는 복음은 보통 좋은 의미로 통용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선 버리긴 아깝지만, 그렇게 갖고 싶지도 않은 것이 복음의 속성이기도 했다. 베르처럼 그 속에 담긴 본래 의미나 의도가 아닌 내가 듣고 싶고 바라고 싶은 그런 것일 때만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볍게, 고깝게 여기는 것. 그것이 복음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들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정녕 복음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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