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불건전한 성경공부의 위험성, 노재석 목사(전주서부중앙교회)
불건전한 성경공부의 위험성 1
최근 어떤 목사가 전주에 와서 은밀하게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우리교회 성도가 참석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 그 목사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 고 김 아무개 목사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김아무개 목사는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장기영 교수의 분석을 참고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김 목사의 사생활과 인격적인 부분은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에 무비판적으로 빠져 들어서 균형을 잃은 왜곡된 신앙을 지교회 안에서 확산시키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그의 설교는 성경본문이 다양하게 바뀌어도 문맥을 무시하고 모든 본문을 알레고리적으로 풀어가는 설명방식이 천편일률적이라 할 정도로 유사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그의 메시지가 마틴 루터와 같이 구원과 인간 삶의 모든 원인을 100%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리고,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0.001%도 돌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즉, 그의 메시지가 참으로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만을 선포한다고 생각하기에, 그 메시지를 접하는 분들은 자신들은 과거에 복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그 메시지에 무비판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을 보인다.
1. 그렇다면, 그가 제시하는 복음이 과연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메시지인가? 그는 루터가 인간을 "노예의지"를 가진 존재로 설명한 것보다 더 극단적이고 부정적으로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극단적인 초칼빈주의적인 주장을 한다. 예를 들면, 믿음과 거룩한 삶은 물론이고, 인간이 죄에 빠져서 도덕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사는 것도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신자가 도덕적으로 언제나 가장 밑바닥이며 변화 받지 못한 존재인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뿐만 아니라, 신자의 어떤 의지적 노력의 가치도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만 돌리는 그의 가르침이 어떻게 이상해지는지, 삼단논법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자도 죄인일 뿐이며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떤 선행도, 하나님 앞에서의 어떤 경건도 불가능하다. 2) 신자라도 죄에 빠져 살 수밖에 없지만, 그들이 가끔씩 죄를 이기고 또 가끔씩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만 가능하다. 3) 여기에서 그의 주장은 이상한 결론에 이르는데, 하나님께서 늘 승리하게 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자는 늘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늘” 지배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죄에 대해 넘어지면서 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부정하는 그의 가르침은 결국 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죄에 대해 승리하지 못하는 책임까지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주장으로부터 심각하게 비성경적인 주장을 한다. 즉 신자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그 모든 노력은 인간의 교만의 표현이고, 자기 의를 쌓는 것이고, 율법주의라는 주장을 한다. 그 결과, 율법을 어기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 범죄라는 해괴한 논리를 모든 설교에서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성경적 죄의 정의는 요일 3:4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죄는 불법, 즉 율법을 어기고,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죄의 정의를 바꾸어버린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죄고, 율법이 명령하는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율법을 행하려 하는 것이 죄고, 선을 행하겠다고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뒤집는다.
2.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할까? 그의 설교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글들에서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 논리이다. 선악과를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과 연결시켜서 죄의 본질은 교만이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누구나 교만하여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율법을 행함으로 스스로 거룩해지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얼핏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선악과 논리의 교묘함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란 바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을 어긴 죄”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죄”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어 버리는 데 있다. 결국, 성화의 교리, 말씀에 대한 순종, 선행에 대한 권면을 뒤엎어버리기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교묘한 수단이 바로 “선악과” 논리이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죄의 본질은 숨겨버리고 그 대신 “선악과”만 전면에 내세운다. 교묘하게 율법에 순종하려는 것을 죄로 만들어버리고, 성화로 나아가려는 것을 죄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인 순종과 성화를 인간의 교만과 자기 우상화의 죄로 뒤바꾸어버린다. 여기에는 아주 위험한 율법무용론의 함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오히려 정반대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 때문에 인간이 저지른 죄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리는 불순종의 죄였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 하는 교만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 되려는 반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하나님 권위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불건전한 성경공부의 위험성 2
김성수 목사가 순종과 성화를 전복시키는데 사용하는 또 다른 논리가 “바리새인” 논리다. 바리새인이 율법을 행하고도 예수께 사탄의 자식이라는 꾸지람과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 교만이고, 인간의 자기 우상화라고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진정으로 율법을 행한 자들일까? 마 23: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책망하신 이유는 율법의 정신은 지키지 않으면서 외식과 위선으로 율법을 깨뜨린 것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참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을 지킨 자들이 아니다. 율법을 몇 가지 외적인 행동규칙으로 만들어서 그것만 행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결의론적인 태도를 가진, 율법을 왜곡하고, 어긴 자들이었다. 그러나 김 목사는 율법을 지키려 함으로써 하나님처럼 되려 하지 말라, 율법을 행함으로써 거룩한 척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벗어난 자들, 하나님처럼 되려 한 자들이었다. 요일 3:4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는 죄의 정의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정신을 실천하지 않는 율법 없음,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1계명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죄이다. 따라서 제 1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교만하여 하나님처럼 되려 할 수가 없고, 오히려 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제 1계명을 깨뜨리는 죄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다.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교만이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지 않고,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고 반역하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대로 참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서부터 행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성령님을 의지하고,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틴 루터가 강조했듯, 제 1 계명, 즉 믿음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회복한 하나님 자녀들은, 그 믿음을 바탕으로 다른 모든 계명들에도 순종하는 삶을 열매로 맺는 것이 믿음의 열매이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의 모습이다.
김 목사의 성경해석에 문제가 있다. 그의 설교 동영상이 온라인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전파되면서 곳곳에 추종자들이 모임을 갖는다. 문제는 그 영향을 받우면 신앙관이 상당히 편협해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1) 2012년 서울 S교회 사경회 설교에서 그는 히브리어는 자음밖에 없는데 그 자음 한자 한자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히브리어가 뜻글자인가?) 그 의미를 풀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허황된 주장을 함으로써 성경 영감을 히브리어 영감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될 경우 히브리어를 모르는 일반인은 성경을 모르는 것이고, 항상 히브리어를 아는 자들만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또 그는 전에 잠시 유행했던 (바이블 코드 식 해석)과 유사한 해석을 대단한 진리 발견인 것처럼 주장한다. 성경해석의 기본원리인 자연스러운, 원래의, 일관된 의미를 찾는 노력에서 자연스러운 해석을 저해하는 해석을 하는 것이다.
2) ‘영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동영상에는 그의 세계관이 나타난다. 그는 성경적 세계관으로 우리 삶을 이해하기보다는 우리 삶을 ‘꿈과 광야’로 이해하는데, 육신과 영혼에 대한 이원론적인 관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듣는 내내 바울이 딤전 4:1-5에서 강력하게 비판했던 사람들-‘후일에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으리라고 한 말씀이 생각났다. 그 가르침이 영육 이원론에 입각한 거짓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또 성경은 어디를 읽어도 예수라면서 사 34:15,16의 ‘짝’이란 말을 인용하면서 대부분의 이단들처럼 성경에는 여기저기 짝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단들이 자기들의 이단사상의 근거로 삼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본문의 ‘짝’은 동물의 짝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자신이 성경만 갖고 설교 한다면서도 사실은 전혀 본문 문맥과 상관없이 말하고 있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성도들을 또 다른 미혹에 빠지게 만들거나, 적어도 또 다른 잘못된 신앙관에 빠져드는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는 성경의 모든 것이 예수라고 강조하면서 성경에는 성숙과 삶에 관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딤후 3:16,17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성숙과 삶에 관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성경은 믿는 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신약을 읽어보라.
4) 그의 설교를 들은 결론은 '야! 알레고리 해석을 아주 고급스럽게 한다.'였다. 성경 원어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그리스도적 알레고리, 즉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 결론내리는 해석을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원어를 모르는 많은 평신도들에게 상당한 매력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안타깝게도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좋은 전통 중에 하나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를 오해한 것이다. ‘오직 성경’은 무조건 성경만 거론, 인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사제들의 손에 독점되었던 성경을 평신도들의 손에 돌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축복 중에 하나가 이제는 어떤 특별한 직분이 성경을 독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을 모국어로 읽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정신을 되돌려서 또 다시 원어를 읽고 해석할 줄 아는 특별한 사람의 손에 성경을 넘겨준다면 개신교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오늘 한국의 평신도들은 스스로 병신도가 되려는가? 안타깝다. 성경을 모국어로 읽으라! 모국어로 읽어도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출처: http://sbjac.co.kr/main/sub.html?Mode=view&boardID=www11&num=1603&page=0&keyfield=&key=&bC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