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하봄의 신학

[발췌]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김효남 교수

여돌북클럽 2021. 10. 18. 13:06

※ 출처: 김효남 교수 페이스북


1.

<우리 교단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 일전에 나는 내가 속한 합동 측 교단이 우려스럽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우려는 지금까지 늘 제기되어 왔던 윤리적인 우려가 아니라 신학적인 우려였다. 합동 측이 자랑해왔던 개혁신학에 있어서 작금의 현실은 매우 우려스럽다.

2. 신학적인 우려는 크게 세가지였다. 첫째는 성경적인 근거를 찾기 힘들고 개혁신학적 입장에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 세례의 허용이다.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은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 중에 하나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3. 둘째는 로마카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이들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재세례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지금까지 개혁파 신학과 교단에서 견지해온 전통과는 다르다. 물론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회의 표지 중에 하나인 성례 문제를 논의할 때에는 더욱 신중할 뿐만 아니라 형제 개혁교단들이나 외국 개혁교회와의 협력과 조언 속에서 결정했어야 한다.

4. 셋째는 능동적 순종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형제 개혁교단의 신학자들을 이단조사 하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5. 지금까지 전세계 정통 개혁주의 교회에서 확고하게 인정되고 있는 능동적 순종 교리를 이단조사위로 넘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최근 교단 총회에서 내린 결정은 더욱더 실망스럽다.

6. 능동적 순종교리에 관한 두 분의 건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분명한 성경적인 근거는 잘못되었"으므로 "합신교단에 맡겨 처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것이 무려 총회의 결정이란다. 이를 어찌할꼬.

7. 물론 나도 능동적 순종교리를 받아들인다. 아니 그 교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러니 합동측 총회보고서에 의하면 나도 역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잘못된 교리를 믿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런데 나는 다른 교단이 아니니 우리 교단에서 나를 치리할지도 모르겠다.

8. 도대체 어떤 개혁주의 신학에서 능동적 순종을 거짓된 교리라고 하는가? 이들이 말하는 개혁주의는 도대체 어떤 개혁주의인가?

9. 나는 약 10년간 미국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와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역사신학을 공부했다. 당연히 역사적 개혁주의 문서와 탁월했던 16,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글을 주로 공부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개혁파 안에서 소수의 무리들이 이를 부정하려 했으나 여러방편으로 그들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하고 능동적 순종은 개혁파 신학의 한 부분으로 오늘까지 전해진다.

10. 우리 교단 신학의 기초를 놓으셨던 박형용 박사님도 당연히 이 교리를 받아들이신다. 내가 알기로 총신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의 교수님들도 대부분 당연히 이 교리를 받아들이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떤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성경적인 근거가 없단 말인가? 그 개혁주의는 누구의 개혁주의인가?

11. 김병훈, 노승수 교수님이 능동적 순종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단대책위원회의 조사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분들을 고발한 이들은 이분들의 다른 교리가 아니라 이 능동적 순종 교리만으로 이단조사대상이 되셨다. 그렇다면 헤르만 바빙크도, 루이스 벌코프도, 그리고 박형용 박사님도 살아계셨으면 이대위에 고발되어 이단 조사대상이 되셨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런 코미디가 어디에 있는가?

12. 분명히 나는 또 이들의 타겟이 될 것이다. 이 두 분을 능동적 순종으로 고발했던 이들은 청교도들이 가르쳤던 준비론(doctrine of preparation)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도 위협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불행히도(?) 석사(Th.M) 논문을 조엘 비키 교수님과 함께 청교도들의 준비론에 대해서 썼다. 리처드 멀러 교수님과 함께 쓴 박사 학위 논문에도 청교도들의 준비론이 소개되고 있다. 당연히 청교도들의 준비론이 이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시키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운다는 주장을 논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13. 나는 이들을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청교도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도 청교도 존 오웬이 처음으로 주장을 했다고 하면서 공격한다. 이 얼마나 무지의 소치인가! 세상에 존 오웬이 능동적 순종 교리의 시조라니...

14. 그렇게 청교도를 공격하고 이제 청교도의 대표적 교리인 준비론을 이단적 사상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이미 수십 년 전에 현대적 논의가 끝났고, 그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이 논쟁이 마치 새로운 것인 양, 자신들이 새롭게 발견했다는 듯이 가져와서 독침을 쏘아 댄다.

15. 내가 깨달은 것은 이들의 목표는 어떤 신학자가 아니라 청교도 신학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명색이 "Puritan" 신학교를 나온 내가 조용히 있어서야 되겠는가? 나에게 귀한 생명의 진리를 알려주었던 그들과 그들의 성경적인 진리가 더럽혀지도록 그냥 있을 수 없기에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아, 추가로, 행위언약이 윌리엄 퍼킨스에 의해서 최초로 조직화되었다고 하신다. 이것도 역시 타겟을 청교도에 두고 있다는 반증이다. 퍼킨스 목사님께서도 깜짝 놀라실 일이다.

2.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은 왜 필요한가? 1>

1.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이해는 성경과 성경을 통해 세운 개혁신학의 체계에 대한 이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단순히 구원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에서 뿌리를 둔 신학의 전반적인 체계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선악과의 열매를 먹는 것에 관한 명령과 약속을 통하여 아담과 최초로 행위언약이 맺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언약이란 하나님과 이성적 피조물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3.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경에 행위언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개혁파 신학의 틀 안에 있던 이들의 대부분은 이를 인정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개혁파 안에서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간간히 제기되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령 행위언약을 부정하더라도 모세가 율법을 주기 전에 율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개혁파 신학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신 명령과 약속이 언약으로의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했느냐? 혹은 그것이 진정으로 아담의 행위와 그 행위의 본유적인 가치에 따라 영생이 주어지는 “행위”언약이냐에 대한 의견 차이였습니다.

4. 그러나 최근에 한국인 목회자들과 신학자 극히 일부가 개혁신학을 척도로 내세우면서, 행위언약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명령을 율법으로 보지도 않고, 아담의 영생도 그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조건부로 부여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상관없이 창조 시에 이미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주장하는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역사적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누구도 하지 않았던 주장으로서 개혁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신신학입니다.

5. 다시 행위언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일반적으로 행위언약을 선악과의 열매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명령과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연구한 많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행위언약이 그 본질에 있어서 율법과 동일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조건과 명령을 주시고 아담이 그 조건과 명령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약속과 벌을 주신 것을 행위언약이라고 하는데, 이 조건이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 혹은 속성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6. 그렇다면 이 율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원리를 만들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율법을 명문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이 사람에게 다르고 저 사람에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시대에 다르고 저 시대에 다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7.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피조물에 대하여 그 존재론적 차이(창조주-피조물)에서 비롯된 요구를 하게 됩니다. 이것을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그 속성상 모든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 분이고 순종을 받아야 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적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가 죄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그 죄를 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은 피조물로서 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명시적으로 말씀하시거나 명하지 않으셔도 본성상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율법도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율법 혹은 도덕법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존재론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것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8. 문제는 아담이 이 율법,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비롯된 의무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율법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비록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언약을 제안하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와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따라 일정한 명령 혹은 율법이 주어졌고, 인간에게는 그것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 혹은 율법을 어기게 되면,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0.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악과를 통해서 맺은 행위언약과 아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조건이 있고, 인간에게는 순종의 의무가 있으며, 그 행위 혹은 순종의 유무에 따라 상과 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를 창조의 법(jus creationis), 자연언약(foedus naturale), 혹은 행위언약(foedus operum)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통한 언약은 이 자연언약이 에덴이라는 특정한 상황에 명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행위언약에 대한 일종의 실정법(positive law)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1.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명확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명령(명시적이든, 자연발생적이든), 곧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행위언약(율법)은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존재했으며, 이는 영원토록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이 변함없으며,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지위도 영원히 동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결국 무죄한 아담은 그 자체로 영생을 확보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상태는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었으며(행위언약 혹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는 죽음과 그것이 의미하는 영원한 심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도 역시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지위와 속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아담이 이미 영생을 확보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영생을 확보했다면 영생해야 합니다. 타락하지 않던지, 타락하더라도 심판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속성상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죄를 범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하듯이 타락 전 아담은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posse peccare sive non peccare)였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peccare)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입어 영화된 택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여전히 행위언약의 의무 아래 있던 아담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13. 앞서 언급했던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으므로 아담의 상태는 영생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완전히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 타락의 가능성, 곧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하나님의 드러난 의지(voluntas signi 혹은 voluntas revelata)에 대해서 아담을 비롯한 피조물이 완전하게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담에게는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의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요.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김으로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이는 자신의 본성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율법을 어긴 것도 됩니다.

14. 결국 성경이 말하고, 또 역사적 개혁파 신학자들이 거의 공통으로 주장했던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확정해야 합니다. 첫째, 성경은 타락 이전에 행위언약 혹은 창조의 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 명령에 대한 순종의 여부가 아담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인간의 영생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준수 여부에 필연적으로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서 세 번째 진리가 도출됩니다. 바로 아담은 결코 창조 시에 영생을 이미 보유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의 순종 여부에 따라 영생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